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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 설명

*본 글은 2021 부산국제통일리더십포럼 개회예배 설교문으로, 김지철 목사님의 허락을 받아 게재합니다.

 

 

“진정한 탄식이 소망이다” (출2:23-25)

김지철 목사  (한반도평화연구원KPI 이사장)

 

 

오늘 이곳에 한반도의 평화와 통일을 준비하며 기도하는 그리스도인들이 함께 모였습니다. 

 

우리가 서 있는 한반도의 상황은 결코 녹록지 않습니다. 1945년 해방 이후에 분단의 역사가 76년째 계속되고 있습니다. 우리는 6.25 전쟁을 통해 동족상잔의 아픔을 경험했고, 그동안 분단의 지속과 북한군의 도발과 협박으로 인한 수많은 상처를 받기도 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 이 시간 우리가 함께 모인 것은, 우리가 저 북녘 백성들의 탄식과 신음소리를 듣기에, 이 땅에 진정으로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하나님의 나라, 평화와 통일의 역사가 어떻게 하면 이루어질까 하나님께 기도하는 마음으로 모인 것입니다. 

 

한반도 평화를 위해서 기도했던 저 자신의 모습이 기억이 납니다. 1995년은 해방된 지 신학적으로 말하는 희년이 되던 해였습니다. “이 희년에 하나님 나라의 물꼬가 새롭게 트이지 않을까?” 그렇게 기도했던 기억이 되살아납니다. 그러나 그러지 아니했습니다. 다시 기다렸습니다. 그러면서 “이스라엘이 바벨론 포로 귀환처럼 70년이 되는 2015년에 하나님께서 새로운 역사를 베풀어주지 않을까?” 그런 기도를 하면서 하나님께 아뢰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아무런 변화의 징조가 나타나지 않았습니다. 그때 저 자신이 하나님 앞에서 탄식했습니다. “하나님, 이 민족, 이 민족은 이스라엘 백성들보다 못한 백성입니까? 하나님 저 북녘에 고통받는 사람들, 매일 부르짖고 탄식하는 저들의 신음소리를 하나님은 외면하십니까? 하나님의 진정한 뜻과 섭리는 어디에 있는 것입니까?” 지금도 이 물음은 제 안에서 계속되고 있습니다. 

 

문제는 저들의 신음소리가 점점 커지고 있다는 점입니다. 그런데 우리 귀에는 잘 안 들리고 있습니다. 최근에 탈북하는 사람들이 격감하다 보니, 북녘의 탄식하던 목소리조차 이제 대한민국 사람들에게 잘 들리지 않습니다. 아니 귀담아듣지 않고 있습니다. 남쪽의 사정도 비슷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60-70대 우리 어르신들이 그동안 열심히 불렀던 ‘우리의 소원은 통일’이라고 하던 노래도 이제는 더는 듣기 쉽지 않습니다. 

 

그렇다고 하면 실제로 이 한반도에 탄식과 신음의 소리가 정말 없는 것일까요?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분명히 있습니다. 우리가 이곳에 모여서 함께 이야기를 나눌 때, 저들의 탄식 이야기를 함께 들으면서 이 탄식 속에 임하시며 우리를 사랑하는 그 따뜻한 하나님의 또 다른 탄식 소리를 들어야 합니다. 

 

 

인간의 탄식이란 무엇을 뜻할까요? 내 뜻대로 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나는 지금 고통받고 있다는 뜻입니다. 나는 지금 절망의 환경에서 어쩔 줄 모르고 있다는 모습입니다. 더 이상 소망이 없다는 것, 누구에게도, 어떤 경우에도 기대를 걸 수 없는 막다른 자리에 내가 놓여 있다는 것이 우리로 하여금 탄식하지 않을 수 없는 부르짖음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 안에는 한 맺힌 아주 외로운 고백과 아픔이 들어가 있습니다. 인간이 탄식하면서 실망하고 슬퍼하는 시간이 지속되면 그 속에 분노와 원망이 생겨나기 시작합니다. 그러면서 예수 믿는 우리조차도 그 상황 속에서 하나님을 향하여 질문을 합니다. “하나님, 어찌하여? 하나님, 왜 이런 상황을 지속시키십니까?” 하나님께 물음을 갖게 됩니다. 

 

 

그렇다고 하면 우리 사람들, 인간만이 탄식하는 것일까요? 아닙니다. 성경을 읽어보면 하나님께서도 탄식하십니다. 복음서를 보면 예수님도 그 시대를 바라보며 탄식하십니다. 고통받는 사람들을 보면서 탄식하시고, 교만한 사람들을 보면서 탄식하십니다. 예루살렘을 보면서 탄식하십니다. 성령님께서도 로마서 8장에 보면 이 시대가 가지고 있는 피조물의 탄식, 성도들의 탄식과 함께 성령님께서 탄식한다고 기록이 되어있습니다. 

 

오늘 본문 속에 나타나는 탄식 속에 하나님께서 임하시는 모습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탄식할 때 어떤 모습이 들어가 있는 것일까요? 하나님도 인간처럼 똑같은 안타까움으로 탄식합니다. 하나님의 슬픔과 하나님의 실망과 하나님이 갖고 계신 안타까움 속에서 하나님께서는 인간을 바라보시면서 탄식하십니다. 창세기 6장 8절에 보면, 하나님은 땅 위에 사람 지으셨음을 한탄하사 근심하시고 인간이 하나님으로부터 떠나가는 모습을 보면서 탄식하십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탄식은 인간의 탄식과 다른 점이 있습니다. 그 안에는 하나님의 기다림이 있습니다. 그 안에는 하나님의 약속이 들어가 있습니다. 인간이 진정으로 자기의 문제를 알고 하나님께 탄식하고 있는가를 눈여겨보시면서 하나님께서는 기다리고 계십니다. 하나님의 탄식 속에는 하나님의 긍휼의 모습이 들어있고, 사랑의 모습이 들어있어서 탄식하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이 그것을 가르쳐 줍니다. 출애굽기 2장 23절을 보면, “여러 해 후에 애굽 왕은 죽었고 이스라엘 자손은 고된 노동으로 말미암아 탄식하며 부르짖으니 그 고된 노동으로 말미암아 그 부르짖는 소리가 하나님께 상달된지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최근에 구약학자인 월터 브루그만이 코로나 19의 참담한 상황을 보면서 쓴 글이 있습니다. 우리말로 번역되어 있는데 『다시 춤추기 시작할 때까지』라는 작은 책자입니다. 여기에 보면 그는 구약에 나타난 탄식과 시편들의 나타난 구절들을 인용하며 이렇게 말합니다. 인간이 탄식할 때에 진정한 새로운 희망이 주어진다고 말합니다. 그러면서 재미있게도 그 단어를 합한 내용을 가르쳐 줍니다. ‘미래 없는 탄식’과 ‘탄식 없는 미래’, 이것이 우리가 가지고 있는 문제라는 거예요. 

 

윌터 브루그만 [다시 춤추기 시작할 때까지]

 

‘미래 없는 탄식’은 탄식만 한다는 것입니다. 꿈꾸지 않고, 변하지 않고 그것을 바라보지 않고 탄식만 하는 것, 오늘의 문제 때문에 아파하기만 하고 부르짖기만 하는 입니다. 미래를 꿈꾸지 못하는 탄식’은 자기 연민과 자기 절망의 빠질 수밖에 없는 자리로 나아간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수없는 탄식 소리를 얼마나 많이 듣고 있습니까? 지금도 자살하는 사람들의 마지막 탄식, 좋은 부모를 만나지 못해 죽어가는 어린 아이들의 탄식, 젊은 청년임에도 앞으로의 미래가 불확실하다고 여기고 내뱉는 탄식, 악한 독재자를 만나서 자유를 누리지 못하며 억압받고 있는 북녘 백성의 탄식, 대한민국에 탈북민으로 왔지만 살기가 녹록하지 않아서 힘겹게 살아가면서 아파하는 탄식, 그 탄식 소리들이 우리 귀에 들려오는 것입니다. 미래가 보이지를 않습니다. 그래서 더욱 절망합니다. 그 가슴 아프게 한 맺힌 부르짖음이 있는 현장을 곳곳에서 발견할 수 있습니다. 

 

또 하나의 문제, ‘탄식 없는 미래’, 이것은 더 위험한 것처럼 보입니다. 단순히 장밋빛 희망만을 주입하면서 내가 지금 경험하고 있는 위기, 지금 상황의 고통과 연약함에 대하여 탄식하지 않고 미래의 꿈만 주려는 것, 잘못된 길을 가면서도 자기를 돌아보지 않고 내가 하나님 앞에서 잘못된 인간인가를 되돌아보지 않는 탄식, 이것은 온전한 개혁과 성숙을 가져다주지 못하는 모습입니다. 

 

그렇다면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어떻게 해야 할까요? 특별히 목회자들은 무엇을 탄식해야 할까요? 하나님 없이도 무엇인가 성취할 수 있다고 여기는 그런 무지갯빛 과학과 기술주의 낙관론을 탄식해야 하는 것입니다. 돈이라는 우상의 노예가 되어 왜곡된 자본주의와 탐욕스러운 과소비주의를 즐기는 시대를 향해 탄식하는 것입니다. 남의 인권을 조롱하면서 성적인 탐닉을 가지고 외피적인 쾌락주의를 보면서 탄식하지 않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공의와 정의를 입으로는 외치지만 거짓과 불의를 일삼는 위선적인 신앙을 보면서 우리는 탄식하지 않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갈등과 분쟁을 야기하고 서로 적대하게 만드는 권력 집단의 이기주의를 보면서 탄식하는 것입니다. 지상의 우상인 수령론에 의해서 하늘의 살아계신 하나님을 상실하고 부르짖는 저 북한 주민의 절망적인 탄식을 안타까워하며 우리도 함께 탄식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마음을 아프게 하는 모든 악한 사탄의 세력들, 인간을 억누르고 위협하고 조롱하는 죽음의 세력들, 인간의 존엄성을 훼손하는 거짓된 이데올로기와 못된 사상들을 보면서 탄식해야 합니다. 코로나 19의 전염병의 창궐로 말미암아 생명의 풍요로움을 말살시키는 죽음의 공포 앞에 떨고 있는 이 시대, 지구촌 곳곳에서 일어나는 아우성을 보면서 우리는 탄식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여러분, 우리가 탄식하는 이유는 한 가지입니다. 새로운 미래를 만드시는 하나님의 도우심을 받기 위해서 우리는 탄식하는 것입니다. 인간의 탄식과 하나님의 탄식이 서로 만날 때 새로운 생명의 세계가 시작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때 치유가 일어나고 회복의 역사가 일어나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은 그들이 가진 고난 속에서 탄식하는 부르짖음을 통해 노예 생활 속에서 탈출시키시는 하나님의 거대하신 약속을 다시 가슴속에 갖게 되었습니다. 그때 지상에서 벌어지는 탄식의 부르짖음을 통해 하나님의 탄식하시는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를 깨닫게 됩니다. 그 역사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의 아침의 역사인 것입니다. 인간이 당하는 모든 고난을 당신이 대신 다 지시고 인간의 탄식을 당신이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마27:46)하고 탄식하시면서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신 그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우리는 지금도 탄식하면서 하나님의 탄식하시는 사랑 속에 들어갈 수가 있다는 말씀입니다.

 

저는 목회하면서 늘 그렇게 생각을 했습니다. 인생의 모든 문제의 답은 예수님에게 있다. 예수님이 대답이다. 무슨 문제에 대한 인생에 고통받고 있고 좌절하고 절망하는 모든 문제에 대하여 예수님은 항상 답이다. 바로 이것을 선언하는 것이 우리의 자랑인 것입니다. 예수님이 생명이요, 예수님이 자유요. 예수님이 죄 용서요 예수님이 진리요, 예수님이 길이요, 예수님이 평강이요, 예수님이 모든 것의 모든 것이 되시는 그것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최고의 선물이라는 것입니다. 

 

 

 

우리의 탄식과 하나님의 탄식이 만나면서 하나님의 사랑의 약속을 기억하게 되고, 예수 그리스도를 다시 확인하게 될 때 우리의 탄식은 서서히 바뀌기 시작합니다. 탄식이 변하여 노래가 되고, 탄식이 변하여 감사가 되고, 탄식이 변하여 감탄과 경탄으로 바뀌게 되고, 우리의 탄식 소리 속에서 다시 하나님을 찬양하는 다시 등장하게 됩니다. 

 

 

여러분, 시편의 이야기는 그런 이야기였습니다. 우리의 신앙 선배들의 이야기들도 그런 이야기였습니다. 탄식으로부터 시작했지만, 하나님의 거대한 사랑의 역사를 경험하면서 경탄함으로 하나님을 찬양했던 역사입니다. 물론 현실은 바로 바뀌지 않을 때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탄식 소리를 들으면서 우리는 하나님의 마음으로 현장을 대할 때에 하나님께서 이제는 나를 버려두시지를 않고 나와 함께 일하시고 계시다는 것을 깨달을 수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하나님은 지금도 겸손하게 탄식하며 하나님을 향하여 부르짖는 사람을 기다리고 계십니다. 우리의 탄식이 하나님의 탄식과 함께 만날 때에 탄식을 통해 미래를 새롭게 열어가는 자리가 될 수 있습니다. 진정으로 탄식하는 그 자리가 바로 소망의 자리입니다. 희망의 자리입니다. 우리가 가지고 있는 현실의 암울한 자리가 아무리 클지라도 누군가가 하나님의 마음으로 탄식하면 그때 하나님께서 주시는 믿음의 역사가 나타나게 될 것입니다.

 

앞으로의 2박 3일이 우리에게 인간의 탄식소리와 하나님의 탄식하는 음성 소리를 동시에 듣는 시간이 되면 좋겠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어떻게 우리를 사랑하시는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이 땅에 하나님 나라 역사를 만들어가고 있는지 보기를 원합니다. 우리가 우리의 마음속에 그것을 확인하게 되면 우리는 탄식에만 머무르지 않고 새롭게 하나님과 하나님 나라의 역사와 한반도의 평화와 한반도의 통일의 역사를 만들어 갈 수 있을 것입니다. 

 

 

 기도

하나님 아버지, 감사합니다. 귀한 주님의 종들이 한반도의 평화와 통일의 역사를 꿈꾸며 오늘 이 자리에 모였습니다. 우리 눈앞의 현실은 우리의 기대와 너무 다르기에 우리가 탄식합니다. 그러나 이 탄식 속에서 우리의 탄식을 들으시며 탄식하시는 하나님의 음성을 다시 듣게 하시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일어난 하나님의 약속을 바라보면서 다시 새로운 발걸음을 시작할 수 있도록 주의 성령님께서 하나님의 사람들을 축복하시고 붙들어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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